남에게 뭔가를 줄 때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대는 자칫 큰 실망을 부른다.
받을 것에 대한 기대 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풀면 내가 행복해진다. 행여 돌아오는 게 있다면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자선을 베풀 때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성경의 구절과 같이해야 한다. 이번 호에서는 바라지 말고 베푸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무주상보시
무주상보시는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이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것이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派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 주는 일을 말한다. 보시에는 3가지가 있다.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불법을 가르쳐 주는 법시(法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됐다.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고 보는 데서부터 무주상보시가 이뤄져야 하고, 이 보시를 위해서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살림살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전제했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궁극적으로 ‘집착’만을 남기게 되어 오히려 궁극적으로 깨달음으로 갈 수 없게 만든다.
2. 무주상보시의 출처
무주상보시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의경전인 <금강경(金剛經)>에 의해서 천명(闡明)된 것이다. 다음은 금강경 제4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妙行無住分(묘행무주분)
復次 須菩堤,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 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 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
聲香味觸法 布施. 須菩堤,菩薩應如是布施 不住相 何以故 若菩薩
성향미촉법 보시. 수보리,보살응여시보시 부주상 하이고 약보살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堤,,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양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
不. 佛也世尊. 須菩堤 南西北方 四維 上下虛空 可思量不. 佛也世尊.
부. 불야세존. 수보리 남서북방 사유 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須菩堤,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堤, 菩薩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여시 불가사양 수보리, 보살
但應如所敎住.
단응여소교주.
집착하지 않는 행동
‘수보리야, 보살은 내가 설명한 방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남을 대할 때는 주는 마음으로 대하여라. 어떻게 남을 상대해서 좋은 마음을 쓰는가 하면, 형상이 예쁘다고 주는 마음을 내지 말아라. 소리가 좋아서 마음을 준다든지 냄새 맡기가 좋아서 마음을 준다든지 장래에 잡아먹기 위해서 먹이를 준다든지 이와 같이 오관을 통해서 남에게 주는 것은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보살이 어떤 행동을 할 때, 형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나 보수를 바라지 아니하고 자기 일을 하면 마음이 닦아지고 무한대로 발전할 것이니라. 수보리야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쪽 서쪽 북쪽 그리고 그사이와 위아래 허공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하면 그 공덕은 앞에서 말한 동서남북 위아래의 허공과 같이 한량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렇게 내가 가르친 대로 마음을 다스릴 것이니라.’
3. 무주상보시의 진정한 의미
불교에서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육바라밀 수행의 첫 번째 덕목으로써 보시바라밀이라고도 한다.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좋은 수행이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에 옮기는 것으로 보시를 한다. 즉, 남에게 베풂으로써 욕심을 뒤집어 자비심으로 만드는 수행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남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욕심만 차리자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욕심에 가려서 자비심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베풂은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욕심을 줄여야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르게 되는 첫걸음인데, 단순하게 욕심을 내지 않는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남에게 도움을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에게 있는 욕심을 없애겠다는 것이 수행이 되는 것이다. 즉, 욕심이 많은 마음을 무욕심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무욕심을 지나서 자비심으로 바꾸는 게 수행이라는 뜻이다.
내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남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낀다는 작용에 있어서는 나와 남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온 우주가 하나의 몸뚱이로 작용하게 된다.
마치 발이 아프면 손이 가서 약을 발라주는데, 이때 손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도와준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두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도와준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베풂인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보시를 베풀었지만 보시했다는 마음조차 내지 않는 것이 무수상보시이다. 본래 법성이 공한데 내 것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며, 그리하여 베풀었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뿐이다.
공덕을 바라고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거래를 한 것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자체로서 번뇌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베풀었다는 의식은 집착만을 남기게 되고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상태에까지 이끌 수 있는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허공처럼 맑은 마음으로 보시하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무주상보시라고 보는 것이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으로 시끄러운 사람들,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말들 때문에 좋은 일을 하고도 공덕(功德)이 쌓이지 못하는 것이다. 선업(善業)이 쌓여 힘이 되기도 전에 조금씩 쏟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쉼 없이 유루(有漏)의 행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남에게 전혀 베풀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자랑 자체를 자신의 일로 삼는 심보 때문에 선을 더 큰 복덕이나 공덕으로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마(達磨)대사를 만난 양무제(梁武帝, 464~549)가 물었다. “내가 오리(五里)에 작은 절 하나, 십리에 큰 절 하나씩을 짓고 수많은 승려를 만들어 불사(佛事)를 이루었는데 공덕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자 달마대사는 “소무공덕(所無功德)!”이라 했다. 즉, 아무 공덕도 없다는 뜻이다. 자랑하는 마음, 공치사를 바라는 마음은 비움을 중시하고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의 본질로 하는 선(禪)의 세계가 아니다.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을 돕는 일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남을 돕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보다 남을 돕는 일이 우선인 사람들도 있다. 누가 보아도 정말 바라는 바 없이 남을 돕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선을 행한다. 그러고는 그 선행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주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지 못하고 무주상보시를 못하는 것이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업(業)’이 된다. 상(相) 없이 선업을 쌓아 가노라면 결국 그것이 무루(無漏)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연을 따라가는 것이 인생이다. 이 역시 무주상으로 해야 한다. 집착하고 상을 내고 하는 인연은 결코 아무리 잘해도 상생의 선연은 아니다.
따라서 인연을 지어가되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마음이 그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무주상보시’로 만냥의 황금을 얻는 것보다도 큰 공덕이 아닐까?
4. 백은선사 이야기
일본의 백은(白隱)선사가 길가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문둥병 환자가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 불쌍하고 딱하여 자신이 입었던 누더기를 벗어서 입혀주었다.
그러나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했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남의 신세를 짓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나 무슨 표정이라도 지을 일이지 어찌 그러한가?” 그러자 말하길, “여보시오. 대사! 내가 옷을 입어 주었으니, 문둥이님! 보시를 받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이나 아니면 표정이라도 좀 지어야 하지 않겠소.”하며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이 순간 선사는 그만 땅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면서 아직도 소승의 수행이 모자라 성현을 몰라뵈었다고 말했다. 그제야 선사는 그 문둥이가 바로 문수보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무주상보시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5. 무주상보시의 정신으로 복지에 앞장서자!
국내 복지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복지는 이제 시대정신이어서 피할 수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소외계층을 이제라도 돌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복지지출은 10%도 안 된다. 또한 OECD 평균인 20%의 절반 수준이다. 마땅히 복지지출을 늘려야 하나, 제로성장 시대에 그 많은 재원을 조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제는 국민모두가 우리 안의 소외계층과 약자들도 보듬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특히 정부에서는 복지에 대한 기본 개념을 새로 정립, 시행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복지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부의 몫 외에 국민 개개인이 나서 민간복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민간복지의 정점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있다. ‘내가’, ‘무엇을’, ‘아무개에게 베풀었다’는 마음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푸는 행위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이라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서 그렇다. 나와 남이 딴 몸이라면 왜 생색이 없겠는가? 동료에게 밥 한 끼 사면서도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판인데.
‘줬다는 마음 없이 베풀며 살기’는 우아한 말이지만, 독실한 종교인이라도 실천하기 어렵다. 탐욕스런 자본주의의 나라라는 미국도 민간복지 지출이 GDP의 10%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2% 미만이다.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인색한 생각을 버리고 이제라도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며 살았으면 한다.
<월간 피그 2017년 5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