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 산업연구원 박영준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요약>
두 가지 트렌드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제, 문화를 지배했다. 첫째는 장치 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을 포함하는 기존 조선, 철강, 그리고 정유 산업이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후발국의 도전을 심각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제조업, 경제, 문화 전반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는 ‘4차 산업혁명(4.0)’이라는 용어이다. 이러한 가운데 비교적 장치 산업으로 여겨지던 메모리 반도체만이 한국의 지배력을 더욱 크게 벌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에 본지에서는 4.0이라는 패러다임이 주는 함의를 이해하고 한국 반도체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새로운 국가적인 전략을 생각해본다.
삼성전자의 8GB 모바일 D램(사진. 삼성전자)
1. 4차 혁명의 의미
지난 300년 간, 증기기관 발명이 주도한 1차 산업혁명, 전기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2차 혁명, 그리고 반도체, 컴퓨터, 통신기술이 주도한 3차 정보혁명 이후, 4.0혁명은 가장 강력한 인류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류가 거쳐 온 세 가지 혁명은 새로운 기술이 주도했지만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으로 인간의 생활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1차 산업혁명은 신흥 브르주아 계급의 탄생으로 시민혁명의 단초가 되었고, 빠른 인구의 도시화로 노동 문제, 환경 문제를 태동시켰다. 이후 전기에너지가 주도한 2차 혁명, 3차 정보혁명이 가져다준 인류 전반의 변화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4차 혁명은 이와는 다른 차원의 인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1) 4차 혁명의 본질은 정보 생산 저장 0원, 유통속도 0초에 있다
4차 혁명의 본질은 인간의 인과관계를 찾는 능력을 뛰어넘는 정보 혁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동안 인류 역사에서 경제, 군사, 정치, 그리고 과학발전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던 정보 획득과 가치 발견의 경험과 비교해서 4.0시대에서는 정보 획득의 양이 무한대에 수렴하고, 정보의 유통, 그리고 판단에 필요한 시간의 요구가 0에 수렴한다는 점이다. 정보의 양과 통신, 판단에 필요한 속도가 인간의 능력한계를 빠르게 넘고 있는 인류 최초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더 이상 인간의지식과 경험이 새로운 요구에 대응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4차 혁명을 드라이브하는 첫 번째 요소는 정보의 획득을 위한 가격이 0에 수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보로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영상 획득을 예로 들어보자. 지난 40년 동안 반도체 기술자들은 렌즈를 통한 영상을 화학 필름 대신 반도체에서 처리하고 이를 저장하는 가능성을 탐구해 왔다.
CIS(CMOS Image Sensor)가 바로 그것이다. 빛의 세기가 반도체 PN접합에 들어오면 세기에 비례해서 발생하는 자유전자의 수를 세어서 전기신호로 바꾸어주는 것이 아이디어다.
간단해 보이는 이 기술이 지난 10년 전, 길거리에서 화학필름 현상소를 없애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CIS에서 더 좋은 화질을 만들어 내기 위한 기술적인 발전이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핵심은 화질을 즉시 저장하는 장치인 ‘낸드플래시’ 메모리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저장에 필요한 가격이 거의 0원으로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지금 사진기 버튼을 누르면서, 저장가격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1Gbit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를 1달러 이하로 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의 유전자를 읽어내는 데 1조 원 정도가 들었다. 현재는 1,000달러 정도로 유전자를 읽을 수 있다. 유전자를 이루는 A-T, G-C 정보의 양이 수조 비트 정도이므로 한 비트당 가격이 낸드플래시보다 더 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유전자를 읽은 사람의 수가 10명에 불과하던 것이 이제 만 명, 곧 수백만 명 선으로 증가하고 있다. 생명의 코드 정보획득 가격이 0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2) 왜 갑자기 인공지능(AI)인가?
최근 4.0 시대에 빠지지 않는 시대의 총아가 인공지능이다. 지난 40년 동안 물밑에서 조용히 있던 인공지능이 갑자기 시대의 총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구글이 하고, 바이두가 하고, 삼성이 한다. 최근 컴퓨터 전공 학생의 대부분이 인공지능으로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전술한 CIS의 경우와 비슷하게, 인공지능을 다시 무대 위로 올려놓은 주연과 조연은 반도체이다. CIS가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온 데에 낸드플래시 메모리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물론 CIS 이미지 설계, 공정기술의 몇 가지 진보가 있었지만), AI에서도 최근 두 가지 정도의 기술적인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AI의 필요성이 갑자기 대두된 것과 AI에 필요한 계산이 작은 반도체 보드로 가능해진 것이다. 지금 엔비디아((NVIDIA)가 만든 그래픽 보드가 AI를 지원하는 표준 프로세서가 되고 있으며, 많은 반도체 과학자들이 이보다 더 효율적인 AI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CMOS Image Sensor(사진. Wikimedia)
2. 4.0 관점에서 본 한국 반도체
(1) 반도체산업 본질의 변화 : 무어와 아키텍처의 공존
무어의 법칙으로 대변되는 3년마다 2배씩 집적도가 증가하는 게임이 지난 40년을 지배해왔다.
집적도를 증가시키기 위한 미세 제조기술의 진화는 메모리 반도체, CPU(모바일 포함)의 집적도 증가와 더불어 높은 정보처리 속도, 그리고 낮은 에너지 소모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지구 인구보다도 많은 숫자의 트랜지스터를 손톱만한 한 개의 칩에 담은 8Gbit DRAM이 출현하고, 1Gbit 메모리칩이 1달러 이하로 팔리고 있다. 정보 처리 속도 역시 한 게이트(정보 처리를 위한 회로 단위)당 속도가 10㎓를 넘은 지 오래되었다.
바야흐로 기가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정보혁명 3.0을 주도했고 전술한 4.0혁명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한국의 반도체 기술자들은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10㎜대로 줄이고 있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 간의 크기가 1㎜의 반 정도임을 고려하면, 트랜지스터를 분자 수십 개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무어의 패러다임의 끝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무어의 패러다임으로 컴퓨터 또한 발전했다. 무어의 패러다임으로 3.0정보혁명을 이끈 컴퓨터 구조의 기본은 소위 폰 노이만 구조다. 우리가 곱셈, 나눗셈을 하듯이 숫자를 메모리에 저장하고 필요한 연산을 종이(CPU)에서 한 후, 중간에 나머지를 중간 메모리에 잠시 기억시킨 후, 다음 연산에서 사용하는 일을 직렬로 해 나가는 구조다. 지난 30년을 지배한 인텔의 CPU, 그리고 모바일 폰의 CPU가 이러한 구조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물체와 언어의 인식을 잘 하는 사람의 뇌는 이러한 폰 노이만 구조를 택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서 생물은 작은 에너지를 이용해, 느린 신경세포로도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뇌를 진화시켰다. 물체를 빠르게 인식해야 하는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에는 인간의 뇌를 모사하는 소위 AI 컴퓨터 구조가 무어 패러다임 다음을 약속하고 있다. 또한 4.0시대를 이끌 컴퓨터 아키텍처를 선점하기 위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무어 패러다임과 폰 노이만 패러다임의 끝에 인간이 서 있는 형국이다.
(2) 한국 반도체 : 3.0시대에서 세계를 배운 총아
한국은 반도체 메모리의 절대 강자이다. DRAM에서 세계 1, 2위 기업을 가지고 있고 낸드플래시에서는 세계 1, 3위 기업을 가지고 있다. 세계 DRAM 공급의 70% 이상을 담당하고 있고 전체 이익의 90% 정도를 한국이 가져오고 있다. 성공의 비결은 대기업의 적시 투자와 한 세대 동안 최고 인력의 지속적인 투입이다. 1980년대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성공을 예견한 사람은 없다. 심지어 1990년대 초 1MDRAM에서 이익을 낼 때까지 반도체 때문에 삼성이 망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도시바, 히타치, NEC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기업의 기술과 마케팅, 자금력이 워낙 막강해서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메모리의 성공은 기술 선진국이 버리는 산업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전쟁에서 쟁취한 선물이다. 핵심은 대규모 투자를 적시한 경영판단과 우수한 인력이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이다. 우수한 인력은 치열한 기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각종 문화를 창조했다. 1~2년 주기로 새로운 칩을 만들어내야 하는 게임에서 살아남은 스피드 개발문화이다. 1M 다음은 4M, 다음은 1만 6,256M DRAM으로 이어지는 칩을 매년 내놓아야 하는 게임에서 이겨 20년간 굳건히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인류 과학기술 역사에 한국의 반도체 개발 역사는 가장 특별한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간과하기 쉬운 다른 선물은 메모리 칩 판매를 하는 과정에서 얻은 세계 최고 마케팅 경험이고 시스템 노하우로 아마도 사업을 통한 이익보다도 더한 가치를 가져다주었다. 메모리를 팔기 위해서 만난 사람들이 3.0정보혁명을 이끄는 선두 회사였다는 점이다. IBM, HP,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델사 등에 메모리를 팔면서 처음에는 문전박대, 다음에는 그들의 요구를 맞추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지금은 메모리 구조를 선도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시장의 요구와 3.0을 이끄는 수준의 디테일을 배우게 되었다. 다른 산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선물을 한국의 반도체가 축적했다. 그리고 다른 사업영역에도 접목했다.
TI의 단일 메모리 16비트 MCU(사진.TI코리아)
3. 새로운 한국 반도체 플래그십 프로젝트
(1) 자동차 엔진과 반도체: 잘못된 시각
무어와 폰 노이만 패러다임의 끝에서 한국의 반도체 개발이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반도체 연구개발 전략이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난 10년 전부터 실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에 반도체 개발을 맡긴다는 전략 아닌 포기하는 형국이다.
거기에는 자동차 엔진 개발의 논리가 있다. 지난 100년을 풍미해 왔던 자동차 엔진이 도전을 받고 있다. 3,000만 원대 자동차에 엔진은 100만 원 남짓이다. 차내 시트보다도 가격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으로, 자동차 엔진이 핵심 부품임에도 불구하고 가치는 낮은 것이다. 더 이상 가치를 보탤 것이 없고, 큰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플레이어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더 큰 이유는 가솔린 구동 자동차가 더 이상 미래 패러다임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환경요인을 들지 않더라도 미래 자동차는 전기자동차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반도체도 자동차 엔진과 같은가? 물론 가격은 싸졌다. 그러나 반도체는 가솔린 엔진과는 다르다. 실리콘 반도체 다음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4.0혁명을 드라이브하는 축이 되고 있다. 그리고 무어의 끝 언저리에서 필요한 수많은 공정기술, 소자기술, 그리고 회로기술이 극한 기술, 이론과 맞닥뜨린다. 극한 소자, 회로 그리고 시스템 이론으로 무장한 인재들이 앞으로 30년간 더 공급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재는 오직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의해서만 자랄 수 있다. 한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의 반도체는 단순히 반도체 제조업이 아니다. 반도체를 통해서 세계 초일류와 경쟁하고 초일류 고객사와 만난다. 이러한 경험이 한국의 전체 기술 수준을 올리는 창구이다.
(2) 시스템 2010 국가 프로젝트를 4.0 반도체 프로젝트로
1990년 초, 한국 정부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와 반도체 3사, 그리고 대학을 주축으로 시스템 2010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총 연구비 1,000억 원과 연인원 5,000명을 동원해서 반도체 메모리 공정 소자 기술, 그리고 시스템 IC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했다.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장비기술과 업체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성장했다. 그리고 팹리스 창업이 생기고 수천 명의 반도체 인재가 성장하고 회사에 진출하여 현재 한국 반도체를 이끌고 있다.
이제 새로운 국가 프로젝트가 탄생할 때이다. 지금과 같은 국가 연구개발 전략으로는 인재가 공급되지 않고, 4.0을 드라이브하는 반도체 추진력을 잃게 된다. 중국 등 후발국들의 절실한 희망과 노력을 고려하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새로운 반도체 국가 프로젝트는 4.0반도체 플래그십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무어의 마지막을 선도하는 극한 반도체 소자 물리, 공정기술, 장비기술, 회로 설계기술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4.0시대를 풍미할 인공지능에 적합한 CPU, 소프트웨어, 메모리 아키텍처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
(3) 연구개발을 공유경제와 플랫폼 개발로
4.0혁명이 가져다준 변화 중 가장 큰 것은 공유 경제 패러다임이다. 정보가 공유됨에 따라 사유화했던 수많은 재화들의 소유보다는 사용(Circulation)에 더 가치를 두는 경제로 빠르게 진화되었다. 공유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귀찮던 벽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차라리 공산주의가 4.0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다고 할 정도다. 우버나 카카오톡 택시, 에어 비앤비를 예로 들 필요도 없다. 대학과 연구소의 반도체 연구개발 또한 공유경제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오픈 소프트웨어, 오픈 연구개발 시설의 공유, 심지어 상당 부분 연구결과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4.0시대의 특징은 핵심 인력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반도체 4.0에서 핵심 가치를 발휘하는 사람은 반도체로부터 빅데이터를 설계하고 획득하는 사람, 여기에 인과관계를 찾는 물리, 화학재료, 신뢰성 과학자, 그리고 시장을 창출하는 시스템 설계자이다. 이러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길러지지는 않는다. 국가는 핵심 인력을 기르고 공급하는 일을 해야 한다. 한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키슬리의 S540 전력 반도체 테스트 시스템(사진. 한국텍트로닉스)
4. 결론
1980년대부터 시작한 반도체 신화의 시작이 30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반도체 신화는 국가 전체의 기술 기반과 사업 형태를 선진화시켰다. 그리고 세계는 반도체가 불붙인 4.0시대를 시작하고 있다. 다음 한 세대가 지난 후, 만약 반도체의 중심이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갔다고 가정하자.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는 국가가 우수 인력을 공급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익이 나는 곳이라면 자본은 어차피 세계 어디서나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핵심은 인력이다. 이 핵심 인력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길러진다.
그리고 다시 반도체를 회복하려고 했을 때 필요한 국가적 비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정부 1년 예산을 다 사용해도 힘들지도 모른다. 지난 10년간 정부의 반도체 연구개발 정책은 기본적으로 무정책이다. 단기적이고 표피적인 작은 기술개발에 적은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다시 반도체 연구개발 전략을 짤 때이다. 지금이 가장 적은 돈으로 4.0을 주도할 기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