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자동펌프 50년! 「도전과 열정의 드라마」4 제4화 「조국의 물 걱정을 해결하자!」 後편 pump 기자 2015-09-21 13: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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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일전기(주) 설립 

 

 한일전기(韓一電機)그룹의 창업자 김상호 명예회장은 부모님을 따라 4살 때인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교포의 신분으로 1943년 현재의 국립 고베대학(國立 神戶大學) 공학부의 전신인 관립 고베고등학교(官立 神戶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명문 기술계 학교인 고베고등학교에서 기술자의 자질을 연마한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 의도적으로 큰 기업 대신 작은 공장에 입사해 실용적인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그 여파로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자 김상호 명예회장은 기계 분야 회사로의 재취업이 어렵다고 판단해 치밀한 준비 후에 사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는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벌목사업, 유리병 제조사업 등을 의욕적으로 벌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고물상인 금원상점(金原商店 ; 현재의 호국상회)을 창업했는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사업적인 운이 따르면서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동서 냉전시대 개막, 한국전쟁 발발 등의 요인으로 일본 경제가 특수를 누리는 상황에서 업종 선택을 절묘하게 한 덕분이었다

 

산요전기와의 운명적인 만남


사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김상호 명예회장은 못 다한 기술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회사 한편에 기계를 제조하는 공간과 설비를 마련하고 기계 부품들을 직접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주로 만든 것은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전기세탁기의 부품들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전기세탁기 붐을 일으킨 회사는 훗날 세계적인 가전제품 회사로 성장하는 산요전기[三洋電機]였다. 자신이 직접 제작한 부품들이 품질 면에서 우수하다고 자부심을 가진 김상호 명예회장은 1951년 산요전기 시가공장장을 만나 세탁기 부품을 납품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이미 김상호 명예회장이 만든 세탁기 부품들의 우수성에 주목하고 있던 산요전기 시가공장장은 이러한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때부터 김상호 명예회장과 산요전기의 운명적인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김상호 명예회장은 세탁기에 들어가는 모터의 부속품을 시작으로 생산 품목을 확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세탁기 부품을 본격적으로생산하기 위해 1954년 6월 1일 직원2명을 채용하고 호남철공소(湖南鐵工所)를 설립하였다. 세탁기 생산 및 판매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면서 이에 비례해 김상호 명예회장의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였다.
산요전기의 핵심 협력회사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하지만 김상호 명예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완제품 전기세탁기를 만들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호남철공소는 설립 초창기 프레임 가공, 부속품 일부 제작을 시작으로 1957년 금형 제작에 이어 1958년부터 탈수기와 메탈 조립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실질적으로 완제품 전기세탁기 생산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제품 세탁기를 생산하기 위한 제반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한 김상호 명예회장은 산요전기에 이러한 뜻을 간곡하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산요전기는 김상호 명예회장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였다. 아직은 완제품 생산이 시기상조 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세탁기 수요가 자신들의 생산량 한계를 초과할 정도로 급증하자 산요전기는 호남철공소가 핵심 부품 몇 가지를 제작해주는 조건으로 결국 완제품 생산을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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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4. 1 경향신문 광고

 

부속품에서 시작해 완제품 전기세탁기 생산


오랜 숙원이었던 완제품 세탁기 생산이 현실화되자 김상호 명예회장은 전용 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한 달 만에 세탁기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이 시제품들은 도장 등 여러 부문에서 품질에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상호 명예회장은 도장 설비를 갖춘 신 공장을 건설하였다. 김상호 명예회장은 신 공장이 준공되기 몇 달 전인 1961년 7월 8일 완제품 전기세탁기 생산을 전담하는 호남전기(湖南電機)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호남전기 신 공장은 몇개월의 시험가동을 거쳐 1961년 12월 본격적으로 완제품 세탁기를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 완제품들은 과거 시제품에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해결한 탁월한 성능의 세탁기들이었다. 한편 시제품을 보완하는 단계에서 이미 산요전기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아 1961년 9월 산요전기 세탁기 사업본부장으로부터 기술상을 수여받았다. 세탁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호남전기가 빠르게 자리를 잡게 되자 1963년 1월 김상호 명예회장은 다음과 같은 경영방침을 발표해 직원들을 독려하기 시작하였다.

 

①품질의 충실을 꾀한다.
②안전 작업을 확립한다.
③경영계획을 확립한다.
완제품 세탁기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호남전기 및 호남철공소의 사세는 비약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김상호 명예회장은 1963년 12월 자매회사인 근강정기(近江精機) 주식회사, 1964년 9월 시가흥산(滋賀興産) 주식회사를 차례로 설립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회사들이 일본에서 굴지의 전자제품 회사로 도약하자 김상호 명예회장은 완제품 세탁기 생산을 능가하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염원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바로 봉사를 전제로 한 고국 투자였다.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한 제조업을 통해 조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하기로 한 것이다.


김상호 명예회장은 고국을 떠난 지 38년 만인 1964년 1월 20일 마침내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매부와 함께 서울, 부산, 대구 등을 돌아다니며 적합한 사업을 물색하였다. 이 순방에는 같은 재일교포이자 평생을 의형제로 고락을 함께 하면서 훗날 한일전기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하는 권태완 회장이 동행하였다.
김상호 명예회장은 전문 분야가 세탁기 제조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세탁기를 생산하고 싶었지만 당시의 열악한 국내 경제 사정을 고려할때 세탁기 수요를 기대할 수가 없어 이를 사업 후보에서 가장 먼저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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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일본에 있는 호남전기와 호남철공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품목을 선정하기로 하고 고심 끝에 자동펌프를 생산하는 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1964년 1월 30일 일본 1966. 4. 1 경향신문 광고으로 돌아온 김상호 명예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산요전기에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자동펌프를 단독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수준을 아직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산요전기는 시장을 해외로 확대하는 차원에서 김상호 명예회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문가 2명을 호남전기에 파견해 수개월 동안 자동펌프의 설계·제작에 대한 기술 지도를 행하였다. 

 

자동펌프로 역사적인 첫 걸음 시작


1964년 4월과 8월 한국에 다시 방문해 자동펌프를 생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김상호 명예회장은 1964년 12월 1일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위치한 198.3㎡(약 60평)의 창고 건물을 임차해 자동펌프를 제작하기 위한 기계 설비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김상호 명예회장은 직원 2명을 채용하고 단상모터와 자동펌프시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아울러 김상호 명예회장은 회사명을 한일전기주식회사로 정하고 이 이름으로 1964년 12월 12일 법무국에 등기를 마쳤다. 당시 자본금은 200만 원으로 김상호 명예회장은 국내에서 이 비용을 모두 조달하였다. 김상호 명예회장은 회사를 설립한 직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다음과 같이 사시(社是)를 통해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우리들은 생산을 통하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다. 이를 위하여 규율과 예의를 바르게 하고 기술향상을 도모하며 개척하는 정신을 길러서 기업을 전진시키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한다.”

 

2. 200W 단상 모터 및 자동펌프(p-320 형) 국내 최초 생산

 

200W 단상 모터를 국내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3월에는 1/4 IP 모터와 선풍기 모터 생산에 들어갔다.
이 모터들은 일본 산요전기와 관계가 있는 2개의 회사로부터 사전에 주문을 받은 제품들로 총 8,100대가 납품되었다 .
회사 설립 이후 첫 제품 생산과 납품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초창기에는 사장이 재일교포라 국내에 연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원자재구입, 시장개척, 은행 거래 등 사업 제분야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기제품 도매상으로부터 은근히 배척을 받는 형편이라 판로개척이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1965년 9월 직매점을 설치해 판매를 시작하였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철강 확보 작업


모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금형 치공구(治工具)가 필요하고 이 금형치공구는 최상의 품질을 가진 강철로 제작해야 한다. 1960년대 중반현재 우리나라는 아직 금형 치공구를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도 없고 만들어진 금형 치공구의 규격도 제각각이라 규격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김상호 사장과 직원들은 금형 치공구를 제작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강철을 확보해야만 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강철을 구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는데 그나마 고철상에서 강철을 직접 골라 구매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이때 양질의 강철을 얻기 위해서는 대포의 포신, 포탄, 전차의 캐터필러(caterpillar) 등을 직접 줄로 깎아 일일이 확인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6·25전쟁이 10여 년 전에 끝났지만 다수의 불발탄이 여전히 남아있어 포탄을 깎을 때 폭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 고철상에서 불발탄이 폭발해 사상자가 생기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탄을 깎는 것 말고는 달리 강철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한일전기에서 제작한 최초의 선풍기 모터는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포탄을 깎은 김상호 사장과 직원들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이 보다 한 달 전인 1965년 8월 한일전기에서 역사적인 자동펌프 생산이 시작되었다. 모델명은 p-320 형(200W)으로 한일전기가 최초로 제작한 자동펌프이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된 자동펌프였다.
이 당시에는 한일전기의 자동펌프가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물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일전기는 이 자동펌프를 홍보·판매하기 위해 서울 무교동에 약 5평의 공간을 임차해 직판장을 개설하였다. 직판장 전면에는 자동펌프의 원리가 적용되어 하부 탱크의 물을 흡상(吸上)해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도록 설계한 실연 전시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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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7. 6 동아일보 자동펌프 광고

 

이 장치는 무교동의 명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동펌프를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만 볼 뿐 당시 돈으로 1대에 29,000원이나 하는 고가의 제품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상호 사장은 오전에는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오후에는 무교동의 직판장에서 자동펌프에 대해 상담을 하고 판매를 시도했지만 석 달동안 단 한 대의 자동펌프도 팔지 못했다. 그러나 마침내 11월, 물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한 후에 대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겨우 한 대의 자동펌프를 팔 수 있었다. 판매된 자동펌프는 수입 자동펌프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히 우수했기 때문에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자연스럽게 제1호 제품이 설치된 집을 중심으로 한일전기 자동펌프의 우수성에 대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나 둘 씩 주문이 오기 시작해 1965년 12월 말까지 28대의 자동펌프가 판매되었다. 


 

1966년은 한일전기의 자동펌프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출시 원년 두 자릿수 판매실적을 훨씬 상회하는 1,500대의 판매실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자동펌프 대중화의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물 걱정이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일전기의 자동펌프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자동펌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체계적인 수자원 관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정부 역시 한일전기에서 생산한 자동펌프의 효용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원활한 물 공급을 위해 자동펌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관심은 곧바로 자동펌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관리로 이어졌다. 정부는 개인이나 일부 회사가 한일전기의 자동펌프를 유통시장에서 독점하거나 제품 공급이 일부 지역에 편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감독권을 행사하는 등 한일전기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로부터 몇 년 후인 1970년대 초반 한일전기는 다음과 같은 카피로 신문광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왜 물 때문에 고생을 하십니까?” 

 

 1마력으로도 안 되는데 겨우 200와트로 되겠어요?
- 첫 번째 판매된 자동펌프 

 


1965년 8월 한일전기에서 생산한 최초의 자동펌프이자 국내에서 최초로 제작된 p-320 형 자동펌프는 당시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결코 저렴한 가격이 아니었다. 따라서 제품이 출시되고 세 달 가까이 흘렀지만 단 한 건의 주문도 발생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상호 사장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 모두 결과론적으로 사업 품목을 잘 못 선택한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업의 존폐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1965년 11월에 접어들어서도 지속돼 반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중요한것은 단 한대라도 자동펌프를 파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고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될 즈음 한 고객이 무교동 직판장을 찾았다.
그는 현재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수입산 1마력의 자동펌프를 사용하고 있는데 2층 옥상에 있는 수조까지 물이 올라가지 않아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한일전기의 자동펌프가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 명쾌한 답변을 요구하였다. 마침 현장에 있던 김상호 사장은 “우리 자동펌프는 그 정도 높이 정도야 문제없이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그 고객은 “아니 1마력 대형 수입펌프로도 안 되는데 이렇게 작은 200와트 펌프로 그게 가능합니까?”하며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해 김상호 사장은 자동펌프를 설치하고 만약 물이 안 나오면 반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켰다. 김상호 사장이 이러한 계약내용을 공장에 전화를 걸어 설명하자 직원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를 하였다.
다음날 직원 2명이 그 고객의 집을 방문해 기존 1마력의 대형펌프를 제거하고 p-320 형 자동펌프를 설치하였다. 마침내 역사적인 첫 자동펌프가 설치된 것이다. 설치 직후 한일전기의 자동펌프는 예상대로 기세좋게 물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고객 부부는 이제 번거롭게 물을 2층까지 길어오지 않아도 된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그 고객들은 한일전기의 영원한 고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 한일전기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입소문을 타고 한일전기 자동펌프의 매출은 점점 늘어갔다. 

 

 

<출처 월간PUMP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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